[2013/동아일보-시조] 조은덕 시인

Posted 2014. 11. 25. 11:5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꽃씨, 날아가다



바람이 날라다 준 햇살 한 줌 끌어안고

손가락 굵기만큼 동글 납작 눕히는 무

어머니, 물기 밴 시간 꼬들꼬들 말라 간다


짓무를라, 떼어 내고 뒤집어서 옮겨 놓는

뒤틀린 세월들을 하나 둘씩 펼쳐본다

여름이 남기고 간 속살 광주리에 가득하다


맵고 짠 눈물 섞어 켜켜이 눌러 담은

어둠 속에 숨 고르는 울혈의 무말랭이

주름진 생을 삭힌다, 아린 손끝 붉어온다


돌아가는 모퉁이길 얼비치는 맑은 아침

마른 뼈 꽉 움켜쥔 말간 핏줄 여울목에

어머니 가벼워진 몸, 꽃씨 되어 날아간다



[당선 소감] "기쁨도 감당하기 힘들면 울음이 되는가 봅니다"



기다림이 있으므로 시간은 더디게 갔고, 더딘 만큼 견뎌야 할 생의 길이는 늘어났습니다. 늘어난 생의 길이만큼 또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에 매달려 날마다 초조해하는 것보다 희망도 소원도 없는 게 훨씬 더 편할 거 같아요라는 김수현 선생님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미자의 대사를 내 것처럼 중얼거리고 다녔으나 늘 바라는 것들은 더욱 커지고,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어젯밤 꿈에 스마트폰으로 합격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꿈처럼 2013년 신춘문예 수상 소감을 씁니다. 고맙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 때때로 무너질 때 힘을 북돋아 주신 김봉집 선배님, 그리고 이 길을 가는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없이 목 젖혀 바라보았던 하늘을 우러릅니다. 기쁨도 감당하기 힘들면 울음이 되는가 봅니다. 세상 600개의 언어로도 통역되지 않는 눈물의 빛깔은 투명합니다. 그 투명함 속에 내 어머니가 있고, 평소 조 시인이라고 불러 주시던 먼 유년의 아버지가 계시고, 가까이 있어서 소홀했던 내 가족이 있고, 너무 가까우므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을 이웃이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하므로 용서받고 용서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풋것들가운데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큰절을 올립니다. 우리의 숨결, 우리의 정신이 녹아 있는 현대시조의 마당에 한 계절 밝히는 꽃을 피우겠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언어로 이 땅의 위로가 되겠습니다

 

[심사평] "반성적 성찰, 공감의 진폭 이끌어내는 데 성공"



근년 들어 신춘문예 시조부문 응모작의 대체적인 경향은 표현주의적 색채로 쏠린다는 점일 것이다. 표현이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니 아직 원숙미가 부족한 신인들이라면 의당 여기에 치중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그쳐야 한다. 양념이나 조미료에 의존하는 한 재료 고유의 맛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으로 민승희의 황소’, 유외순의 인각사에서’, 조은덕의 꽃씨, 날아가다등 세 편이 남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각사에서는 역사적 소재가 지닌 창의성의 한계로 인해 순위에서 밀려나고 황소꽃씨, 날아가다를 두고는 장고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과 사유, 감각적인 시어 선택, 상상력의 깊이 등 두 사람 모두 오랜 시력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소는 선짓국을 뜨면서 황소의 존재를 떠올리고 흡사하게 살다간 아버지의 삶을 읽어 내는 상상력의 깊이가 돋보였으나 시선이 과거의 반추에 멈춰 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그에 비해 꽃씨, 날아가다는 무말랭이를 만드는 체험 과정에서 발견해 가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시조 특유의 양식적 긴장미와 맞물려 공감의 진폭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 또한 신뢰를 견인하였음을 밝혀 두며 개성미가 넘치는 작품으로 시조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주길 기대한다.

 

심사위원한분순민병도 시조시인

 

조은덕 시인


▷ 충남 공주 출생

▷ 숭실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재학

▷ TV 탤런트. <사랑과 야망>, <천일의 약속> 등 출연

▷ 한국식물화가협회 회원

▷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이메일주소 : choo1910@naver.com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130101/51977967/1

http://news.donga.com/3/all/20130101/51977976/1

[2013/서울신문-시조] 송필국 시인

Posted 2014. 11. 25. 11:5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번지점프

-해송 현애懸崖



한 점 깃털이 되어

허공 속을 떠돌다가

치솟은 바위틈에 밀려든 솔씨 하나

서릿발

등받이 삼아 웅크리고 잠이 든다


산까치 하품소리

따사로운 햇살 들어

밤이슬에 목을 축인 부엽토 후비작대며

아찔한 난간마루에

고개 삐죽 내민다


버거운 짐 걸머메고 넘어지다 일어서고

더러는 무릎 찧어

허옇게 아문 사리

뒤틀려 꼬인 몸뚱이 벼랑 끝에 매달린다


떨어질듯 되감아 오른 

힘줄 선 저 용틀음

눈 이불 솔잎치마 옹골찬 솔방울이

씨방 속

온기를 품어 천년 세월 버티고 있다.


* 현애 : 벼랑에 붙어 뿌리보다 낮게 기울어져 자라는 나무.


[당선 소감] "시조 속에 더 넓은 세상 담고 싶어"

 


해마다 연말이면 열병을 앓곤 했다. 밤을 밝혀 글을 써도 그게 아니요, 다시 개칠을 해봐도 아닌 시조를 쓰느라 그랬고, 그 글 보내놓고 당선 소식을 기다리느라 더욱 그랬다. 그래도 끝내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적공을 드린 것이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같아 너무 기쁘다.

 

그날도 어느 야외 주차장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꽁꽁 언 하늘에는 듬성듬성 별이 뜨고 있었고 그때 그 별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이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고 우린 서로 꼭 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냥 글이 좋아 글을 썼다. 시나리오로 시작해서 소설로, 다시 시로, 장르 속을 떠돌며 추천도 받아보고 신인 문학상도 타보곤 했다. 그러다 뒤늦게 빠져든 것이 우리 정형시 시조다. 항상 모자라거나 넘쳐나거나 아니면 꽉 조이거나 헐렁하거나 하던 그 매력에.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좀 써보자고 일찍이 귀농을 했다. 하지만 어디 농촌 생활이 선비 타령이나 하고 유유자적할 여유가 있었던가. 온실작물이 주업이 되어 버린 지금 낮에는 시설 작물과 씨름을 하고, 밤이면 늘 제멋대로인 시조를 죽기 살기로 껴안고 살았다.

 

작은 렌즈를 통해 우주를 다 올려다 볼 수 있는 천체 망원경같이 앞으로 시조 속에 더 넓은 세상을 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다. 늘 시조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운 정 미운 정 들여가며.

 

오늘 이 영광스러운 지면을 열어주신 서울신문사와 당선이라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근배, 한분순 두 분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고맙다는 말씀 드린다.

 

처음 시조의 길을 열어 주신 윤금초 교수님, 그리고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봐 주신 주위의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심사평]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표현 돋보여"



오래 담근질해 온 우리의 모국어가 숨겨진 가락을 찾아내 시조의 형식으로 새롭게 태어날 때 그 울림은 크고 받아들이는 느낌은 더욱 깊어진다.

 

온전한 우리의 시인 시조가 형식이라는 굴레를 쓰고서도 어쩌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물음 앞에는 오히려 더 거세고 모질게 파고드는 이 땅의 시재’(詩才)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당선권에 올라오는 작품들이 늘어가고 있는 만큼 올해도 열기는 높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시적 오브제를 역사성이 담긴 사람이나 고적, 유물에서 찾는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작품의 중량감을 더하는 것은 좋으나 신춘문예의 한 패턴으로 인식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당선작 번지점프-해송현애’(송필국)는 바닷가 절벽에 붙어 사는 키가 자라지 못한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세상의 바람과 서리에 맞서는 인간의 생명력을 그려내고 있다. “버거운 짐 걸머메고 넘어지다 일어서고” “떨어질듯 되감아 오른 힘줄선 저 용틀임에서 짙은 삶의 진액이 흘러나온다. “솔씨하나에서 천년의 세월 버티고까지 4수의 구성과 의미의 배열이 잘 짜여지고 낱말 고르기와 꾸밈도 날이 서 있고 맵차다. 앞으로 시조의 나아갈 바에 큰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끝까지 겨룬 작품으로 알츠하이머’(박복영), ‘경을치다’(김성배), ‘막사발 또는 행성’(송정훈), ‘겨울 소리를 보다’(김희동) 등이 각기 다른 감성과 개성적인 수사로 놓치기 아까웠음을 밝혀 둔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한분순(시조시인·왼쪽), 이근배(시조시인)

 

송필국 시인


▷ 경북 칠곡군 북삼읍 출생

▷ 1973년 영화잡지 시나리오 공모 2회 추천 완료

▷중앙시조백일장 월말 장원

▷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이메일주소 : songpilguk@hanmail.net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101037002

[2013/매일신문-시조] 송승원 시인

Posted 2014. 11. 25. 11:5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새는 날개가 있다



당찬 야성 내려놓고 발에 익은 길을 따라

날갯짓 접어둔 채 뒤쭝거린 몸짓으로

달 뜨는 도시의 하루 쪼고 있는 도도새


날아 오른 시간들을 깃털 속 묻어 두고

쿵쿵 뛰는 심장소리 뉘도 몰래 사그라진

그만큼 섬이 된 무게, 어깨를 짓누른다


화석에 든 아이콘이 무젖어 말을 건다

푸드덕 홰를 치는 한 마리 새 나는 행간

앙가슴 풀어헤친 채 물음표를 집어 든다

 



[당선 소감] "부단한 담금질… 새는 날개가 있다"


 

우리는 때로 새였던 시간을 잊어버린 채 힘껏 날 수 있었던 잠재력을 망각하며 지내는지도 모릅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은 어디에 두고 세상이 어려울 때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는 현실을 만나곤 합니다. 그러다 도도새처럼 도태되는 현실이 안타까워 새는 날개가 있다를 주제로 시상을 이끌어 내려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형시인 시조로 많은 사유와 사고를 담고 녹여낸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웃음을 잃어버린 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면서 번민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가슴에 쌓여있는 울컥거린 그 무엇을, 36구라는 시조의 장르에 풀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와 형상화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날을 고민하다 하는 수 없이 응모를 했습니다. 이런 저의 설익은 글을 이렇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관형사를 덧입혀 되돌려 주신 매일신문 관계자와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나태하지 말고 더욱더 분발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부끄럽지 않게 선배님들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아울러 늘 독려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교수님과 문우 여러분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또한 시조를 쓰도록 시간을 할애해 준 아내와 묵묵히 아빠를 응원해 준 우리 두 아들에게도 이 기회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사평] "멸종한 새 통해 활달한 상상·역동적 이미지로 삶 성찰



시조는 정형시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형식을 지키는 것이다. 시조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식이 정제된 것은 우리 정서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형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형식이 전통을 가진 것이라고 해서 전통적인 것만을 담는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를 줄인 말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뜻이 오늘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 명칭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도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당선작을 뽑는 범박한 기준으로 삼았다.

 

일차로 7명의 28편을 뽑았다. 그중에서 한 사람의 작품은 당선 경험이 있는 작품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근년의 신춘문예에서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이었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심사자가 작품에 대해 미흡한 점을 지적했지만 그것이 수용되지 않고 제목을 바꾸어 응모된 작품이라 제외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머지 세 분, 한경정의 '겨울 과원을 지나다'2, 장윤정의 '0시의 녹턴'3, 김경순의 '가을 쉼표'3편은 모두 깔끔한 작품들이었다. 시조에 대한 열정이 묻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성에 기대었고, 비교적 관념 노출이 빈번한 점이 아쉬웠다.

 

나머지 이한의 '산수화에 대한 소견' 4편과 송승원의 '새는 날개가 있다' 3편을 두고 거듭 읽었다. 이한의 작품은 소재가 그림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고, 나름대로 개성적이었다. 그러나 송승원의 작품이 가진 소재의 다양성과 깊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따라서 송승원의 '새는 날개가 있다'를 당선작으로 올린다. 날개가 퇴화되어 날 수 없었고 결국 멸종해 버린 도도새를 통하여 활달한 상상력과 역동적인 이미지로 우리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한 점을 높이 샀다. 우리는 늘 의문부호를 찍으며 산다. 그 의문부호 하나 선명하게 찍은 작품이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아깝게 선에 들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위로를 보낸다.

 

심사위원문무학(시조시인)


송승원 시인


▷ 한성대학교 한국어문학부 졸업

▷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강사

▷ 201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이메일주소 : syi33@hanmail.net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ews_id=68079&yy=2012#axzz3K3rllCJZ

 

[중앙일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바람의 각도



추위를 몰아올 땐 예각으로 날카롭게

소문을 퍼트릴 땐 둗각으로 널따랗게

또 하루 각을 잡으며

바람이 내닫는다.


겉멋 든 누군가의 허파를 부풀리고

치맛바람 부는 학교 허점을 들춰내며

우리의 엇각인 삶에

회초리를 치는 바람


골목을 깨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는 것도

내일을 부화시키려 햇살을 당기는 것도

세상의 평각을 꿈꾸는

나직한 바람의 몫


 

[신작시]


1. 그 겨울 피아니시모



찬바람에 붙박여도 함께여서 따뜻했다.

잊은 기억 찾아보려 다정히 웅크린 노부부

창밖엔 파문진 눈꽃이

겨울밤을 뜨개질한다.


"구세군 자선냄비 역대최고 모금액 달성"

온정을 조율하듯 TV에선 캐럴 울려도

채널을 변경한 추위에

온기 놓친 버거운 골방


질량 닳아 쌓인 흰머리 방 안에 수북하다.

문 두드려 줄 이 없어 퇴화되는 기억의 뼈

가슴 속 창고 깊숙이

꽃잎 꺼내 피우는 밤


치매조차 가르지 못한 오그린 손 꼭 맞잡고

단 한마디 새나갈까 품에 안고 여리게 한 말

"그동안 고마웠어요."

울컥한 그 말

참 시리다.



2. 新과거시대



어둠이 닳기도 전 백지장이 되는 하늘

강남역 출구마다 유생들이 쏟아진다.

첫차가 밑줄 긋고 간

새벽도로는 시험장일까


올해의 글제는 '취업' 합격을 할 때까지

토익책의 갈피에서 글감을 고르는 눈빛

진부한 구인광고에서

새길을 찾아본다.


물먹은 청춘들이 날마다 쓰는 이력

율곡의 일필휘지 천도책을 꿈꾸며

오늘도 책상에 앉아

거친 활자 적어간다.


홍패 같은 달빛 쥐고 막차에 오르는 길

지친 어깨 토닥이는 젊은 날의 그 등 뒤로

한 걸음

더디게 오는

봉인된 내일 열리고 있다.


*천도책: 1558년(명종 13년) 이이가 23세가 되던 별시해(別試解)에 장원하였을 때의 답안.



3. 버킷리스트



어머니가 위독하단 잡음 섞인 전화 한 통

소독된 병실 안은 울음으로 출렁였다.

아파도 아프지 못한 그녀, 침묵한 채 누워 있다.


뜯겨나간 글씨체로 반듯한 꿈을 적다

허름한 삶에 붙들려 구겨진 노트처럼

육탈된 그녀의 손등은 페이지로 뒤집힌다.


까칠한 손등에서 쉼표 없는 문장을 읽는다.

건조체로 꿈틀대며 적혀 있는 행간 사이

권태를 느낄 틈 없던 그녀의 삶 놓여 있다.


단 한번 절정 없이 겨울잠에 든다 해도

저 푸른 봄을 위해 허투루 살지 않기

세상의 언저리 저편 추운 이의 등불 되길


하나둘 써내려간 허기진 소원들이

형광등 온기 아래 활엽으로 만개하자

밤 깊어 졸던 별빛이 부지불식 눈을 뜬다.



4. 벚꽃 지는 봄날



달빛이 여무는 소리 빈 뜨락 잠을 깨고

겨울이 지우지 못한 잔설 같은 꽃가루가

어스름 하얗게 지우며

가풀막을 밝힌다.


두레박을 내려 봐도 닿지 못한 우물의 기억

꽃잎 닿는 자리마다 찰랑대는 물의 지문

가만히 눈을 감으면

고였던 봄 열리고


바람의 현을 타고 다다른 하늘정거장

얼마를 흩날려야 어둠마저 가려질까

눈썹에 내려앉은 꽃

시리도록 눈부시다.


제 몸을 버릴수록 환해지는 벚꽃 아래

달빛에 무릎 꿇고 사뿐히 귀를 비우면

봄날의 여백 사이로 

울창한 숲 동튼다.



5. 까막눈 편지



"어머니 원망해서 미안하고 미안해요."

공책 위에 서투르게 글을 쓰는 박 노인의

캄캄한 지난 꿈들이

느낌표로 켜진다.


글보다 앞선 마음 적을 수 없던 날들

투박한 글씨체로 써내려간 뜨거운 사연

갈 길 먼 늦은 편지에

달빛이 우표를 붙인다.


구불구불 활자에는 맥박이 새로 뛰고

노인의 눈길 속에 환해진 붙박이별

바람의 집배원 따라

하늘로 문안 가고 있다.




[당선 소감] "쿵쾅거리는 심장 같은 시 쓰기 이해 내달리겠다"

 




졸업생의 마지막 학기처럼 떨어지는 달빛에 골목이 환해집니다. 그만큼 골목 한구석 깊어지는 어둠을 보며 우리사회의 견고한 벽 앞에 때론 좌절하는 청춘을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젊기에 밝은 내일을 꿈꾸는 우리의 청춘.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전력질주 하는 삶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할 때마다 밤새도록 활자들을 써 내려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를 찾아 헤맸고, 울창한 시조의 숲을 이루기 위해 정제된 말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소외된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잠시 쉬어갈 그늘이 되라고 덜 여문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치열한 삶 속에서 희망의 세상을 꿈꾸며 뜨거운 시어한줄기 건져 올리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국어사전을 뒤지며 책상에 앉기보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담은 살아 숨 쉬는 시를 쓰기 위해 내달리겠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올려주신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인으로서 가야 할 아득한 길 앞에 기쁨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더욱 앞섭니다. 나를 관통했던 바람처럼 세상 속에 출렁이는 초록빛 언어와 여린 소리를 찾아 정형의 그릇에 잘 담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첫 번째 독자이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늘 격려해준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화성박물관에서 작품을 고민하며 썼던 시간을 떠올리며 활자에 맥박이 뛰도록 창작에 더욱 힘을 쏟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게 문학적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패기 넘치는 '바람의 각도'에 몰표 쏟아져"


또 한 명의 당찬 신인이 최고의 시조 등용문인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탄생했다.

 

별 당위성도 없이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관념적인 응모작 중에서 눈에 띄게 선명한 작품을 보내온 김태형씨다.

 

좀 어설프더라도 신인다운 패기와 실험성을 갖춘 신인의 출현을 기대한 심사위원 전원은 바람의 각도에 최고의 표를 던졌다.

 

당선작 바람의 각도는 아무런 형체가 없는 바람에다 각도 개념을 부여한 제목부터 신선했다.

 

또 바람이 지닌 다의성을 시적 구도 속에서 포착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어둠을 밀치, ‘햇살을 당엇각인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모습은 새로운 영웅이 등장해 타락해 가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듯한 인상을 보여줬다.

 

둘째 수에서 나타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셋째 수에서 드러낸 삶에 대한 따뜻하고도 낙관적인 인식은 이 땅에는 불안한 젊음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강한 메시지도 남겼다. ‘세상의 평각을 꿈꾸는청춘의 아름다운 고민을 잘 보여줬다.

 

시조의 숙명적 조건인 형식미도 잘 갖추고 있다. 율격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기보다 그런 가락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많은 습작이 만든 정제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편안하고 믿음직했다.

 

응모작 중에는 제목이나 내용 가운데 불필요한 외래어가 들어 있거나 이미지를 과도하게 빌려온 경우가 많았다. 시조에서 지양해야 할 문제점들 중 하나다. 당선작 외에도 개성 있는 작품이 많았다. 김주연·용창선·송태준·김영순씨의 작품도 활발하게 거론됐다.

 

심사위원오승철·권갑하·이종문·강현덕

 

김태형 시인


▷ 1986년 서울 출생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 제20회 전국한밭시조백일장 대학일반부 장원

▷ 제5회 전국지용백일장 대학일반부 최우수상

▷ 제11회 혜산박두진전국백일장 대학일반부 으뜸상

▷ 2013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당선


이메일주소: th0214kr@naver.com


당선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231778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231780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극야極夜의 새벽



얼붙은 칠흑 새벽 빗발 선 별자리들

붉은 피 묻어나는 눈보라에 몸을 묻고

연착된 열차 기다리며 지평선에 잠든다.


황도黃道의 뼈를 따라 하늘길이 결빙된다

오로라 황록 꽃은 어디쯤에 피는 걸까

사람도 그 시간 속엔 낡아빠진 문명일 뿐.


난산하는 포유류들 사납게 울부짖고

새들의 언 날개가 분분히 부서진다

빙하가 두꺼워지다 찬 생살이 터질 때.


제 눈알 갉아 먹으며 벌레가 눈을 뜬다

우주의 모서리를 바퀴로 굴리면서

한줌의 빛을 들고서 연금술사가 찾아온다.


황천의 검은 장막 활짝 걷고 문 열어라

무저갱 깊은 바닥 쿵쿵쿵 쿵 울리면서

안맹이 번쩍 눈 뜨듯 부활하라 새벽이여.


* 극야: 밤만 계속되는 시간을 말함. '백야'의 반대현상


 

[신작시]


1. 저녁 공양


이 물을 만났다 물이 불을 만났다

노래에 몸을 담고 몸에 가락을 담아

우주의 율려律呂로 빚은 그릇 하나 앉았다.


하늘을 닮은 입은 순명을 가르치고

땅을 받친 곧은 굽은 대자연을 품었다

분청紛靑에 어루숭어루숭 뭇별들이 떠오른다.


그릇 밖 허공 위로 겹겹이 쌓인 창천蒼天

그득그득 별의 시詩를 담아 내는 저녁 공양

절강한 결가부좌에 묵언마저 뜨거운데.


내 시는 바다 아니라 사발이고 싶은 것

뭉긋해도 마음 열어 귀얄로 꿈을 칠해

깊고 긴 우물 하나를 약속처럼 놓는다.



* 뭇별 : 많은 별들, 분청: 분청사기, 율려 : 율ㄹ는 원래 음악 용어이지만, 음양오행의 동양철학에 기초하고 있고, 고대 신화에서 천지창조의 주인공으로 일컬어지는 등 철학, 신화학 등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된다.

   

2.새벼리 연가戀歌


시월이 남강 만나 맨 처음 건넨 것은

휘 굽었다 뿌려 놓은 금빛물결 시오리길

그 뒤로 쪽찐 어머니 비단신발 보입니다.


아버지 비봉산이 팔검무를 춥니다

분단장한 색바람이 옷고름 잡아 당겨

맑은 물 한 잔만으로 온몸이 뜨겁습니다.


꽃유등 밝혀놓은 이 밤이 잔칫날 밤

진주비단 쌓아놓은 동쪽 끝 새벼리에서

금달빛 켜켜이 풀어 당신 앞에 펼칩니다.


* 새벼리: 진주의 비명, 팔검무: 경남 진주의 춤, 색바람: 가을에 부는 바람




[당선 소감] "시조를 향한 도전, 최전방으로 날아온 당선의 기쁨"

 


극야의 새벽 같은 시간에 따뜻한 여명의 빛 한줄기가 강원도 최전방의 초병에게로 날아왔습니다. 20살의 어린 나이에 처음 시작해본 것은 경남대학교 청년작가아카데미에서 시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언가에 도전하려 하는 청춘의 자그마한 불꽃이었습니다. 모두가 저에게 랭보를 꿈꾸어야 할 청춘의 시간에 시가 아닌 시조를 쓴다고 의아해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늘 제 마음을 사로잡은 시조는 율()로서 완성된다고 굳게 믿고 제 발자국을 정법으로 삼아 또박또박 헤아리며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지독한 필사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묘사와 은유의 공간에서 늘 회초리로 저를 때리며 살아왔습니다. 여름과 겨울마다 하동 평사리에서 가진 지옥훈련 같았던 창작교실이 지금의 저를 키웠습니다. 지금껏 시인들의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가깝게만 느껴졌던 그 하늘이 이렇게 멀 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야흐로 운명의 폭발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이제 스스로 운문의 하늘을 밝히는 초신성이 되었습니다. 청년작가아카데미 교수님들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빛을 머금은 원석이라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이제 그 꿈만 같던 빛을 손아귀에 쥐었습니다.

 

이제 스스로를 더욱 세공하여 늘 정상에서 환하게 빛나는 보석이 되겠습니다. 따뜻한 바다 통영에 계신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존경하는 김정대, 정일근 교수님과 청년작가아카데미에 이 영광을 모두 돌리겠습니다. 이름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조선일보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거침없는 상상력과 활달한 호흡으로 시적 지평 넓혀"

 



약관은 한때 신춘문예의 단골 수식어였다. 그 약관의 관을 얹어 한 시인을 내보낸다. 그의 이름은 김재길, 보무도 당당한 대한민국의 육군 일병이다. 스물을 갓 넘긴 청년의 야심 찬 걸음이 쿵쿵쿵 쿵지축을 울리는 듯하다.

 

응모작에는 충혈의 눈빛이 비치는 게 많았다. 끝까지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은 이윤훈·이병철·장윤정·하양수·송인영씨였다. 정형시로서의 미학적 완성도나 호흡의 안정감, 현실적 맥락을 잃지 않는 감각과 발상, 형식에 함몰되지 않는 신선한 긴장감 등에서 남다른 공력의 시간이 보였다.

 

반가운 것은 공소한 관념이나 낡은 서정이 아닌 오늘 이곳의 살아 있는 삶을 정형(定型) 안에 다듬어 앉히면서 자신의 목소리도 펼쳐낸다는 점이다. 시조에 대한 편견을 날려줄 작품이 늘고 있어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당선자는 그중에도 가장 헌걸찬 형상력과 보폭을 보여준다. ‘오로라’, ‘우주의 모서리’, ‘무저갱까지 거침없이 오르내리는 상상력과 활달한 호흡으로 새벽의 시적 지평을 한층 넓히는 것이다. 낯설고 분방한 그래서 더 역동적인 비유와 이미지들은 정형의 율격을 시원하게 타 넘으며 보기 드문 대륙적 약동을 뿜는다. 이 모두 당선작을 기꺼이 들어 올리게 한 패기와 가능성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 비치는 기술의 과잉 같은 느낌은 주의를 요한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크고 새로운 세계를 번쩍열기 바란다.

 

심사위원) 정수자 시조 시인

 


김재길 시인


▷ 1991년 경남 통영 출생

▷ 2011년 중앙시조 백일장 3월 차상

▷2011년 경남대학교 10.18문학상 수상

▷ 경남대학교 청년작가아카데미 1기 수료

▷ 경남대학교 국문과 3학년 휴학

▷ 현재 육군 일병으로 현역복무 중

▷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이메일주소 : worlf4218@naver.com


사족..

기왕 들어선 문학의 길, 한번 해보자 마음먹고 동기 중 유일하게 시조 쓰기에 돌입했다. 그에게 정 교수는 '사부(師父)'이자 '시부(詩父)'였다. 날마다 혼나고, 어쩌다 칭찬을 들었다. 압축된 시어를 찾기 위해 역대 시조시인들 작품을 찾아 읽었다. 2년쯤 되자 정형시만의 미학적 완성도와 호흡의 안정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틀이 꽉 짜여 있는데도 소리 내 읽으면 시어가 노래하듯 술술 퍼졌다. 50여편의 시조를 썼고, 입대 후 10편을 추려 '혹시나' 하며 신춘문예에 도전했다.


김씨의 이번 당선작은 '극야(極夜)의 새벽'이다. '빙하가 두꺼워지다 찬 생살이 터질 때/ 제 눈알 갉아먹으며 벌레가 눈을 뜬다.' 깊은 우울을 떨치고 희망찬 오늘을 맞겠다는 포부를 담은 연시조다. 작품을 심사한 정수자(56) 시조시인은 "헌걸찬 상상력, 역동적인 비유와 이미지, 패기와 가능성"을 높이 샀다. 한밤중 초소 경계근무를 서며 느낀 결연함을 표현했을까?

 

"처음 사귄 여자 친구에게 갑자기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쓴 거예요. 헤어지자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라는 물음과 갖가지 추측과 엄청난 분노가 일었어요. 제 짧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울면서 쓴 시조이기도 하고요. 원래는 비극적으로 끝났는데 1년 넘게 쉰 번 정도 고쳐 쓰면서 점점 밝아졌어요. 옛분들 말씀처럼 시간이 약이었어요. 작품으로 상처를 치유했달까요."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2/31/2012123101303.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04/2013010402237.html

[2013/중앙일보] 황은주 시인

Posted 2014. 11. 25. 11:49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 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

윗목이 따뜻해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당선 소감습관처럼 혼자 서 있던 모퉁이 그 그늘이 고맙다축복이었다

 


사과 속에서 한 철을 살았다. 병실 침대에 누워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던 계절이 있었다. 문득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고, 그때 단단히 잠겼던 동쪽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동쪽을 편애한다. 동쪽 바람 길에 핀 꽃을 흠모하고, 동쪽으로 가는 새떼들을 경외하고, 무작정 동쪽 바다를 그리워하며 떠나고는 했던 내 시의 여정을 사랑한다.

 

세상이 만화라면 늘 주인공 주변을 흘깃 쳐다보며 정지해 있는 존재 없는 행인이었다. 그러나 펼쳐지는 몇 칸에 행인은 존재하고, 넘어가는 낱장들에도 행인은 존재해 있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행인의 눈으로 시를 써 왔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사실이라는 말 주머니 밖에서 들리는 진실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때로 주인공이 아닌, 부딪치는 또 다른 행인의 이야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통증으로 인해 가슴 너울지는 날들을 견뎌야만 했다. 무릎 꿇고 엎드려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다. 두려웠던 방향의 기후들과 담담히 마주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혼자 서 있던 모퉁이 그늘이 고맙다. 축복이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요란하게 수다를 떨어야겠다. 동부학원 선생님들과 함께 웃어야겠다. 백운사 법륜 스님께 감사 드린다.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드린다. 두 명의 언니가 있어서 행복하다. 가족을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지. 신재야, 얼른 집으로 내려오렴.

 

손바닥이 가장 못생긴 햇볕이 내어 준 가장 맛있는 사과를 먹는 중이다. 따뜻하다. 여전히 물고기자리의 얼룩을 지우며 밤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나의 엄마께 이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풋풋한 사유 오랜 시적 내공을 느꼈다"



새롭게 찾은 사물의 성질, 감각의 명증성, 모국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약동(躍動), ‘진탕만탕 생명력의 잔치’(보들레르) 들이 잘 어우러져야 야무진 시다. 거꾸로 관성과 타성에 기대는 것, 중속(衆俗)의 수다와 너스레, 조악한 모국어 사용 습관, 남의 것 흉내내기 따위는 무른 시의 속성이다.

 

최종적으로 방소씨의 다운의 계절’, 조상호씨의 ()’, 황은주씨의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등이 남았다.

 

방소씨의 시들은 화법과 시각의 유니크함이 눈에 띄었지만, 대상에서 취해야 할 것과 버릴 것들에 대한 분별에서 느슨했다. 그런 결과로 시가 둔탁해졌다. 당선을 겨뤘던 조상호씨의 시들은 이미지 교직(交織)의 촘촘함에서 발군이었다. 이미지의 세공(細工)에서 남다른 시적 조탁의 능력을 엿보게 하지만, 의미의 쇄말주의에 갇힌 아쉬움과 응모한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하고 제쳐졌다.

 

황은주씨의 시들은 시적 수련의 내공을 감지하기에 충분했다. ‘에서 동지를 돌아온 달의 북쪽을 끝점으로 정했다라는 힘찬 첫 구절은 이어지는 느른한 감상주의의 물타기로 인해 그 매혹이 반감되고 만다. 내심 당선작으로 꼽았던 을 제치고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같은 구절에서 그 수일함은 도드라진다. 미숙함이 없지 않고 오장육부를 뒤흔들 만한 놀라운 개성은 아니지만, 사유의 풋풋함과 상상력의 발랄함은 황씨의 미래 가능성에 신뢰를 갖게 한다.

 

끝으로 오병량·권수찬·김은석·양안다씨의 응모작도 인상 깊게 읽었다. 두 심사위원은 그들에게서도 상큼한 도약을 보여줄 수 있는 시적 재능과 개성의 촉을 확인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본심 심사위원=장석남·장석주(대표 집필 장석주)

예심 심사위원=권혁웅·김민정


황은주 시인


▷ 1966년 홍천 출생

▷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 2013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


이메일주소 : sotguihyun@hanmail.net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9364951

[2013/문화일보] 정지우 시인

Posted 2014. 11. 25. 11:4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오늘의 의상



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촛대처럼 나무가 자꾸 떨어뜨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읊고 가는 가을 울음소리가 스르르 바닥에 끌린다

계단이나 혹은 의자로 배치되어 있는 한 철을

나는 양치기 소년으로 지나고 있다



[당선 소감] "시름의 골목 지나는 어린 나에게 돌아가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날들이 되풀이됐다. 한동안 소리를 잃었을 때 모든 밤과 낮을 모아 구겨버린 일들이 소소한 날의 뒤편을 떠다녔다. 내 옆엔 언제나 불면의 그림자만이 작아졌다 커지곤 했다. 시어를 쌓았다 허물어버린 기억이 어제의 눈송이로 내리고 그 위로 겨울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물에 미끄러질 뻔한 손을 간신히 잡아준 아침처럼 당선 소식을 받았다. 아직 어린 아이로 골목을 지나고 있는 나에게 먼저 찾아가고 싶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양떼를 몰고 성당 주위를 돌고 있는 양치기 소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묵상을 의복처럼 걸치고 사물의 바깥에서 길을 잃어도 멀리 성당 종소리에 귀를 붙들려도 중세로 돌아가는 길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잠시 쉬어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몸으로 시를 써서 왼쪽엔 통점을, 오른쪽엔 고독을 모시고 살았다. 문득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엔 더욱 지치고 힘들었던 것 같다. 매번 마침표를 찍고 싶은 순간을 지나치곤 했는데 이제는 그 시름을 넌지시 위로할 수 있겠다. 무수한 날들, 삶의 전환점을 돌아 어린 나에게 돌아가는 일이 헛되지 않음에 감사한다. 오랜 기다림에 손을 내밀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시의 근원이신 엄마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전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쁘다. 언제나 곁에서 독자로 조언과 힘을 실어주었던 남편과 소망을 주는 딸 이주, 이정 그리고 동생 애정이에게 지면을 빌려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봉일, 이문재, 이영광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학우들, 목동 문우들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힘들 때 벗이 돼주었던 동료 논술 선생님들과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면서 희망을 견디기로 한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심사평] "풍성한 비유로 우리 시대의 삶에 화두 제시"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은 박도준의 빨대’, 한그린의 어떤 악기’, 최원의 이웃의 중력’, 정지우의 오늘의 의상이었다.

 

빨대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새끼 곰에 대한 어미 곰의 모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으나 설명이 지나쳐 시적 형성력을 잃고 말았다.

 

어떤 악기는 비뇨기과 탁자 위에 꽂혀 있는 오줌 컵들을 하나의 악기로 파악한 점이 신선하고 기발하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신선함과 기발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이웃의 중력은 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관계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었다. 보통 그 투명함 속에는 냉소적인 차가움이 있게 마련인데 인간적인 따스함이 돋보여 호감이 갔다. 그러나 타 신문사에 중복 투고한 탓으로 더는 심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된 오늘의 의상은 풍성한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의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특정한 모임에 예의상 입고 가는 의상을 일컬어 드레스 코드라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삶에도 특정한 의상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 은유성을 지니고 있으나 결코 종교성에 함락돼 있지 않다는 점이 또한 큰 장점이었다. 함께 투고한 향신료 상인이나 발소리를 포장하는 법등도 시인으로서의 앞날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한국시단의 발전을 위해 자기만의 개성이 두드러진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황동규·정호승

 

정지우 시인


▷ 1970년 구례 출생

▷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 논술 언어력 지도교사

▷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이메일주소 : mermaid0107@hanmail.net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0201034130065026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0201034130065002

[2013/부산일보] 정와연 시인

Posted 2014. 11. 25. 11:48

[부산일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네팔상회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당선 소감]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아"

 


꽁꽁 언 날에 훈훈한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마음은 화끈 달아올랐으나 몸은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날이 내게도 오는구나,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쯤에서 돌아설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기쁜 소식이 전해지려고 그랬을까요.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젖은 땅에 달라붙은 낙엽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빙판길에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았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날마다 감탄하며 살아간다는 어느 노인의 말이 실감 나는 한 해였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선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급변해 요동을 쳤습니다.

먼저 부산일보사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들께도 큰절을 올립니다. 갈팡질팡하는 길목에 주단을 깔아 주셨습니다. 그 길로 선뜻 들어서기가 왠지 두렵지만 들어서렵니다. 주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더 높은 갈래의 길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열심히 찾아가겠습니다.

큰 도움 주신 숭의여대 강형철 교수님, 김양호 교수님, 박상률 교수님, 전기철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마경덕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 고맙습니다. 문우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묵묵히 지켜봐 준 존경하는 남편 김종갑 씨, 시 쓰는 엄마가 멋지고 자랑스럽다는 세 딸 명륜 소나 안지, 아들 재환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이 무한한 기쁨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심사평] "세상의 관절염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

 


나와 너, 나와 우리, 나와 세상 사이에 관절염이 심한 시대에는 통증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언어의 직녀나 기존의 형식을 개성적인 칼로 쳐내는 새로운 검객이 필요하다. 때문에 시력과 시세계가 각각 다른 심사위원들의 눈에 띄는 직녀나 검객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내공의 깊이였다. 안타깝게도 용감하게 수사의 촘촘한 그물망을 벗어나 검을 날리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축에도 문장과 문장을 뛰어넘는 검법에 개연성이 부족했다.

'맥문동 재봉골목'은 예쁘고 앙증맞은 묘사의 보폭이 너무 조심스러워 골목을 벗어나 골목 밖의 세계를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나스카라인'은 대상을 도형화하는 섬세한 솜씨에 깊이 치중하여 도형을 그리는 이유를 상실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나 언어의 숙련을 제고해 봐야 할 것 같다. 당선작으로 합의에 이른 '네팔상회'는 영리한 작품이다. 관계의 관절염을 앓는 시대를 인식하는 깊이와 언어를 직조하는 내공,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시작점을 찍는 노련함은 유려하게 흘러 과장되지 않게 세상의 관절염을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로서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 영리함에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기존의 직조법을 거듭 재탐색할 것이라는 자세도 포함해 주기로 한다


심사위원오탁번·강은교·조말선

 

정와연 시인


▷ 전남 화순 출생

▷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 2013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

▷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이메일주소 : foolpoem@hanmail.net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101000012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101000013

''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중앙일보] 황은주 시인  (0) 2014.11.25
[2013/문화일보] 정지우 시인  (0) 2014.11.25
[2013/경향신문] 이해존 시인  (0) 2014.11.25
[2013/한국일보] 이정훈 시인  (0) 2014.11.25
[2013/동아일보] 이병국 시인  (0) 2014.11.25

[2013/경향신문] 이해존 시인

Posted 2014. 11. 25. 11:48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녹번동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살리나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당선 소감]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사무실 마감 일 때문에 정신없을 때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버리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때였습니다. 연말연시를 생략하고 2월의 어느 일상으로 앞질러가고 싶을 때였습니다. 믿기지 않아 당선 전화를 받고난 후, 누군가 잔인한 위로의 장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확인 전화까지 해야 했습니다.

 

영화 <폴락>에서 피카소는 질서, 폴락은 무질서를 화폭에 담아냅니다. 피카소는 성공을 거둘수록 행복해지지만, 폴락은 그 반대가 됩니다. 성공할수록 질서가 잡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겠습니다. 최종심에서의 수많은 고배가 모루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위로를 건네준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가르침이 되어주시는, 언제나 현역이신 정진규 선생님 그리고 이승훈, 김소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분화구 절벽에 둥지를 틀어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 태생의 시천동인들, 전형철, 윤성택, 안시아, 최치언, 천서봉, 박성현, 서동균 시인, 김솔 소설가, 고영, 박후기 선배님, 가까이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 부모님과 최희강 시인 그리고 등단을 손꼽아 기다려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긴 어둠에서 불을 밝혀 주신 황현산, 박주택 심사위원님과 경향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굳은 결의는 변명의 다른 이름일지 모릅니다. 그냥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심사평] "시는 자신을 비워줄 때 조금씩 다가오는 것"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기예를 넘어 정신의 한 경지를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다운 시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온힘을 다하여 시에 헌신하고 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줄 때 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온다. 시는 결코 설익은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최종에 오른 네 편의 시 가운데 그 여자의 거실에는 기차가 달려가지4편을 응모한 서진배의 시는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산문적 진술에 기대고 있고 급격히 장면을 전치시키거나 전복시켜 시를 읽는 데 재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침묵의 불법 점거에 대한 진술서4편의 김희정의 시는 소음과 환청, 자본주의와 물신과 같은 도시적 생태를 다루고 있으면서 눅눅한 서정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의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쉽게 선외로 밀렸다. ‘귀갓길4편의 김창훈의 시는 그림자에도 단내가 난다”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와 같이 선후 문맥을 잇는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녹번동4편을 응모한 이해존의 시는 그간의 적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선작으로 합의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조(構造)하고 있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해 사유와 감각을 적절하게 가로지르며 생의 경험이 곧 시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는 시여야 한다는 기원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른다면 시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당선자의 대성을 기대해본다.


심사위원) 박주택, 황현산

 


이해존 시인


▷ 1970년 충남 공주 출생

▷ 2013년 경향싱문 신춘문예 시 당선


이메일주소 : 311jon@hanmail.net


당선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312158195&code=960100

''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문화일보] 정지우 시인  (0) 2014.11.25
[2013/부산일보] 정와연 시인  (0) 2014.11.25
[2013/한국일보] 이정훈 시인  (0) 2014.11.25
[2013/동아일보] 이병국 시인  (0) 2014.11.25
[2013/세계일보] 신은숙 시인  (0) 2014.11.25

[2013/한국일보] 이정훈 시인

Posted 2014. 11. 25. 11:47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쏘가리, 호랑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

산과 산 사이

와 여울, 여울과 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 병창 : '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 고라댕이 :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당선 소감"세 번 도리질했는데… 두 아이 이름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갑니다"

 


세상의 하고많은 배역 중왜 제게는 나귀 한 마리와 끝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주어졌는지

 

밤마다 손바닥을 들여다봅니다후벼서 미안하다는 듯 흐르는 이 강을오늘은 애수라고 불러봅니다내가 강가에 마을 하나 지어 놓으면밤나무 두 그루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떠갑니다뇌운 용항 도돈 판운 멀리 주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울 가 삐익 삑, 노루새끼 호드기 붑니다

 

고지를 받았을 땐 지실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아니요, 세 번 도리질 했는데네 번 맞다고 해서 박달재를 넘을 땐말씀으로 수태한 처녀 같았습니다딱!밤톨 떨어지는 소리가 만종처럼 울려 다릿재 꼭대기 노을을 몰고 시속 팔십 킬로미터붕붕 서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립고 고마운 이름이 왜 없겠습니까만나경 해오니 두 아이의 이름 울금빛으로 적어놓고또 밤길을 줄여야합니다

 

고형렬 선생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독특한 개성의 탄생…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 보는 듯"

 

세 명의 심사위원이 투고작 전부를 나눠 읽고 거기서 추린 작품을 토대로 논의를 거듭한 결과 '쏘가리, 호랑이'(이정훈)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을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이 독특한 개성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만 그의 시편들에 내포된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의도적인 시대착오성)을 앞으로의 시작을 통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모색해주길 바란다는 권고를 덧붙이고 싶다.

 

  '단풍나무 빵집'의 손현승은 심사위원들에게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강요한 응모자였다. 대화체를 적절히 활용한 이 시는 대상이 되는 빵-빵집-빵집 여자에 범용한 일상성을 뛰어넘는 서정적 후광을 씌워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원숙한 시선이 인상적인 이 시는 읽다보면 고소한 빵냄새가 주변에 감도는 듯한 풍미를 선사한다. 심사위원 구성이 조금만 달랐다면 최종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를 만큼 이 작품이 주는 매혹은 상당했다.

 

  '곰이 돌아왔다'의 장유정도 아까운 응모자였다. 투고작 전부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견고한 시적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지의 조형이나 어조의 완급조절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적 발상이 새롭지 않다는 난점을 갖고 있었다.

 

  이밖에 '누군가의 단검'의 김지연, '애플파이 레시피'의 고태관, '골목은 모퉁이를 돌면 막혀 있다'의 유병현, '불룩한 체류'의 이문정 등도 기억에 남는 작품을 선보인 응모자들이었다. 이들 모두에게 건필의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황현산, 황지우, 남진우

 


이정훈 시인



▷ 강원도 평창군 출생

▷ 경복고등학교 졸업

▷ 한국외국어대 2년 중퇴

▷ 강원대학교 사학과 졸업

▷ BCT(벌크 시멘트 트레일러) 운전

▷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이메일주소 : man6120@naver.com


당선 소감 및 심사평 출처

한국일보에서 해당 페이지를 삭제했나봅니다.. 못 찾겠네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부산일보] 정와연 시인  (0) 2014.11.25
[2013/경향신문] 이해존 시인  (0) 2014.11.25
[2013/동아일보] 이병국 시인  (0) 2014.11.25
[2013/세계일보] 신은숙 시인  (0) 2014.11.25
[2013/매일신문] 김지명 시인  (0) 201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