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중앙일보-시조] 김태형 시인 ★
Posted 2014. 11. 25. 11:51[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바람의 각도
추위를 몰아올 땐 예각으로 날카롭게
소문을 퍼트릴 땐 둗각으로 널따랗게
또 하루 각을 잡으며
바람이 내닫는다.
겉멋 든 누군가의 허파를 부풀리고
치맛바람 부는 학교 허점을 들춰내며
우리의 엇각인 삶에
회초리를 치는 바람
골목을 깨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는 것도
내일을 부화시키려 햇살을 당기는 것도
세상의 평각을 꿈꾸는
나직한 바람의 몫
[신작시]
1. 그 겨울 피아니시모
찬바람에 붙박여도 함께여서 따뜻했다.
잊은 기억 찾아보려 다정히 웅크린 노부부
창밖엔 파문진 눈꽃이
겨울밤을 뜨개질한다.
"구세군 자선냄비 역대최고 모금액 달성"
온정을 조율하듯 TV에선 캐럴 울려도
채널을 변경한 추위에
온기 놓친 버거운 골방
질량 닳아 쌓인 흰머리 방 안에 수북하다.
문 두드려 줄 이 없어 퇴화되는 기억의 뼈
가슴 속 창고 깊숙이
꽃잎 꺼내 피우는 밤
치매조차 가르지 못한 오그린 손 꼭 맞잡고
단 한마디 새나갈까 품에 안고 여리게 한 말
"그동안 고마웠어요."
울컥한 그 말
참 시리다.
2. 新과거시대
어둠이 닳기도 전 백지장이 되는 하늘
강남역 출구마다 유생들이 쏟아진다.
첫차가 밑줄 긋고 간
새벽도로는 시험장일까
올해의 글제는 '취업' 합격을 할 때까지
토익책의 갈피에서 글감을 고르는 눈빛
진부한 구인광고에서
새길을 찾아본다.
물먹은 청춘들이 날마다 쓰는 이력
율곡의 일필휘지 천도책을 꿈꾸며
오늘도 책상에 앉아
거친 활자 적어간다.
홍패 같은 달빛 쥐고 막차에 오르는 길
지친 어깨 토닥이는 젊은 날의 그 등 뒤로
한 걸음
더디게 오는
봉인된 내일 열리고 있다.
*천도책: 1558년(명종 13년) 이이가 23세가 되던 별시해(別試解)에 장원하였을 때의 답안.
3. 버킷리스트
어머니가 위독하단 잡음 섞인 전화 한 통
소독된 병실 안은 울음으로 출렁였다.
아파도 아프지 못한 그녀, 침묵한 채 누워 있다.
뜯겨나간 글씨체로 반듯한 꿈을 적다
허름한 삶에 붙들려 구겨진 노트처럼
육탈된 그녀의 손등은 페이지로 뒤집힌다.
까칠한 손등에서 쉼표 없는 문장을 읽는다.
건조체로 꿈틀대며 적혀 있는 행간 사이
권태를 느낄 틈 없던 그녀의 삶 놓여 있다.
단 한번 절정 없이 겨울잠에 든다 해도
저 푸른 봄을 위해 허투루 살지 않기
세상의 언저리 저편 추운 이의 등불 되길
하나둘 써내려간 허기진 소원들이
형광등 온기 아래 활엽으로 만개하자
밤 깊어 졸던 별빛이 부지불식 눈을 뜬다.
4. 벚꽃 지는 봄날
달빛이 여무는 소리 빈 뜨락 잠을 깨고
겨울이 지우지 못한 잔설 같은 꽃가루가
어스름 하얗게 지우며
가풀막을 밝힌다.
두레박을 내려 봐도 닿지 못한 우물의 기억
꽃잎 닿는 자리마다 찰랑대는 물의 지문
가만히 눈을 감으면
고였던 봄 열리고
바람의 현을 타고 다다른 하늘정거장
얼마를 흩날려야 어둠마저 가려질까
눈썹에 내려앉은 꽃
시리도록 눈부시다.
제 몸을 버릴수록 환해지는 벚꽃 아래
달빛에 무릎 꿇고 사뿐히 귀를 비우면
봄날의 여백 사이로
울창한 숲 동튼다.
5. 까막눈 편지
"어머니 원망해서 미안하고 미안해요."
공책 위에 서투르게 글을 쓰는 박 노인의
캄캄한 지난 꿈들이
느낌표로 켜진다.
글보다 앞선 마음 적을 수 없던 날들
투박한 글씨체로 써내려간 뜨거운 사연
갈 길 먼 늦은 편지에
달빛이 우표를 붙인다.
구불구불 활자에는 맥박이 새로 뛰고
노인의 눈길 속에 환해진 붙박이별
바람의 집배원 따라
하늘로 문안 가고 있다.
[당선 소감] "쿵쾅거리는 심장 같은 시 쓰기 이해 내달리겠다"
졸업생의 마지막 학기처럼 떨어지는 달빛에 골목이 환해집니다. 그만큼 골목 한구석 깊어지는 어둠을 보며 우리사회의 견고한 벽 앞에 때론 좌절하는 청춘을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젊기에 밝은 내일을 꿈꾸는 우리의 청춘.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전력질주 하는 삶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할 때마다 밤새도록 활자들을 써 내려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를 찾아 헤맸고, 울창한 시조의 숲을 이루기 위해 정제된 말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소외된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잠시 쉬어갈 그늘이 되라고 덜 여문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치열한 삶 속에서 희망의 세상을 꿈꾸며 뜨거운 시어한줄기 건져 올리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국어사전을 뒤지며 책상에 앉기보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담은 살아 숨 쉬는 시를 쓰기 위해 내달리겠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올려주신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인으로서 가야 할 아득한 길 앞에 기쁨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더욱 앞섭니다. 나를 관통했던 바람처럼 세상 속에 출렁이는 초록빛 언어와 여린 소리를 찾아 정형의 그릇에 잘 담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첫 번째 독자이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늘 격려해준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화성박물관에서 작품을 고민하며 썼던 시간을 떠올리며 활자에 맥박이 뛰도록 창작에 더욱 힘을 쏟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게 문학적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패기 넘치는 '바람의 각도'에 몰표 쏟아져"
또 한 명의 당찬 신인이 최고의 시조 등용문인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탄생했다.
별 당위성도 없이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관념적인 응모작 중에서 눈에 띄게 선명한 작품을 보내온 김태형씨다.
좀 어설프더라도 신인다운 패기와 실험성을 갖춘 신인의 출현을 기대한 심사위원 전원은 ‘바람의 각도’에 최고의 표를 던졌다.
당선작 ‘바람의 각도’는 아무런 형체가 없는 바람에다 각도 개념을 부여한 제목부터 신선했다.
또 바람이 지닌 다의성을 시적 구도 속에서 포착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어둠을 밀치’고, ‘햇살을 당’겨 ‘엇각’인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모습은 새로운 영웅이 등장해 타락해 가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듯한 인상을 보여줬다.
둘째 수에서 나타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셋째 수에서 드러낸 삶에 대한 따뜻하고도 낙관적인 인식은 이 땅에는 불안한 젊음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강한 메시지도 남겼다. ‘세상의 평각을 꿈꾸는’ 청춘의 아름다운 고민을 잘 보여줬다.
시조의 숙명적 조건인 형식미도 잘 갖추고 있다. 율격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기보다 그런 가락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많은 습작이 만든 정제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편안하고 믿음직했다.
응모작 중에는 제목이나 내용 가운데 불필요한 외래어가 들어 있거나 이미지를 과도하게 빌려온 경우가 많았다. 시조에서 지양해야 할 문제점들 중 하나다. 당선작 외에도 개성 있는 작품이 많았다. 김주연·용창선·송태준·김영순씨의 작품도 활발하게 거론됐다.
심사위원) 오승철·권갑하·이종문·강현덕
김태형 시인
▷ 1986년 서울 출생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 제20회 전국한밭시조백일장 대학일반부 장원
▷ 제5회 전국지용백일장 대학일반부 최우수상
▷ 제11회 혜산박두진전국백일장 대학일반부 으뜸상
▷ 2013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당선
이메일주소: th0214kr@naver.com
당선소감 및 심사평 출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231778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23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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